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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광반조-석양과 월색의 시
빛을 통해 자연과 인생을 조망하는 차일만
김순옥 (화가, 예술학박사)
평택에 있는 차일만 화백의 작업실에 갔을 때 그는 자연과 동화된 순수한 미소로 필자를 반겼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는 않지만 나지막한 산 아래 자리한 넓은 작업실은 마치 어릴 적 추억이 담겨 있을 듯한 한적한 시골마을에 있었다. 나무와 이름모를 꽃들과 정성껏 가꾼 채소들이 맑은 공기와 함께 도시의 묶은 때를 씻어주는 청량제처럼 느껴졌다.
신비한 구도와 색채의 회광반조
차일만 화백의 작품 소재는 대부분 바다와 넓은 하늘이다. 일몰과 월출을 따로 그리는 화가들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해질녘 동쪽에 달이 떠오르는 두개의 세계가 바뀌는 시점에 구도의 포인트를 두고 있다.
“자연은 참으로 경이롭고 아름답습니다. 오전의 태양빛은 사물을 흡수하고, 오후의 태양빛은 사물에 부딪혀서 반사되면서 더 강합니다. 해가 지기 직전까지 강렬한 빛을 발하다가 어느 덧 어둠 속에 여운을 남기며 신비로운 공간을 연출할 때면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을 갖게 됩니다.”
회광반조(回光反照). 해가 지기 직전에 일시적으로 빛이 더욱 강해지는 이 현상은 비단 자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꺼지기 전의 촛불이 활활 타오르듯 인생도 역사도 지기 전의 마지막 모습에서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열정을 뿜어내곤 한다. 이를 보며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내면의 자아를 성찰하게 된다.
보이는 색채와 보는 색채-괴테적 색채관
차 화백의 색채관은 색채를 인간의 감각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객관적인 실체로 파악하는 뉴턴의 기계론에서 탈피하여 감각과의 연관에서 파악하는 괴테적 관점에 바로 맞닿아 있다. 색채란 눈이 빛의 프리즘을 통해 인식하는 주관적인 존재이며, 인간의 마음에 다양한 느낌을 전해주는 심리학적이고 감성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괴테에 따르면 노랑은 빛에 가장 가까운 색이며 밝음의 성질을 수반하며 즐겁고 명랑하며 고귀한 느낌을 준다. 이에 반해 파랑은 어둠과 고요, 격리된 느낌을 부여한다. 차 화백의 작품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파랑과 노랑의 대조는 밝음과 어두움, 명랑한 기운과 침잠한 고요함이 교차하는 심리적ㆍ시간적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
시각에서 감성으로, 감성에서 의미로
차일만 화백의 작가로서의 독자성은 시각적인 것을 정서적인 것으로, 그리고 이를 다시 의미론적인 것으로 자연스레 전환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즉, 그의 작품은 주정시(主情詩)이자 주의시(主意詩)이기도 하다. 그는 해와 달이 바뀌는 자연현상을 통해 물질주의적인 20세기에서 정신적ㆍ문화적인 21세기로의 전환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시간에 따른 빛의 성질 변화는 모든 것을 흡수했다가 이를 다시 반사한다는 점에서 젊은 날과 노년의 인생 모습을 닮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물의 극적인 변화는 한편으로 혼란과 불안을 야기하지만 그는 등대를 통해 역사의 방향과 희망을 상징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작가
차 화백은 서구적인 외모와 오랜 해외활동의 이력이 주는 선입관과는 달리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보다 넓은 세계적 보편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는 강원도 고성의 한적하고 외진 어촌 마을에서 태어나 한 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을 보고 자랐다. 그에게 바다는 곧 우주였다. 바다와 맞닿은 하늘을 통해 펼쳐지는 대자연의 파노라마는 그에게 인생과 자연의 섭리를 가르쳐 주었다.
그렇다고 차일만 화백을 단순히 향토적인 작가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동안 그의 작품은 국내에서보다도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서 더욱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왔다. 그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전대통령이 창설한 ‘인간과 인간(People to People)'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가 어린 시절 고성 앞바다에서 목격했던 빛의 변화는 아프리카 어느 오지에서 누군가가 바라보는 그 빛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빛을 통해 자연과 인생을 탐구하고 있는 차일만 화백은 민족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함께 담지한 작가이다.
마지막으로 차일만 화백의 향후 작품세계에 대한 변화 방향에 관하여 물었다.
“최근 들어 내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 편견 등 온갖 찌꺼기를 버리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접근하려니까 에메랄드빛 투명한 바다가 보이더군요. 동해의 거친 바다가 아닌 남해 여수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바다가 요즘 저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투명한 에메랄드빛을 담은 그의 화폭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보다 순수한 세계로 안내할 것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