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생활상을 담은 작품
이 작품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새롭게 모습을 바꾼 농촌을 그린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농사일에 땀 흘린 농민들에게 막걸리를 권하며 대화하는 모습을 담았다. 화면 가운데 햇살에 그은 농민, 그 옆에 영부인 육영수여사, 그리고 오른쪽에 박정희 대통령이 보인다. 이 때 만큼은 모든 시름을 잊고 막걸리로 농민들과 소통하는 지도자를 보여주고 싶었다. 쌀 소비 억제를 위해 금지되었던 쌀막걸리 제조가 허용된 것도 그의 재직시절인 1977년 일이었다. 멀리 울창한 숲과 개량 지붕의 농가가 당시 시대상황을 말해준다.
1987년 백악관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면담하는 정주영 전경련 회장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정주영의 아호는 아산(峨山)이다.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에서 아버지 정봉식(鄭捧植)과 어머니 한성실(韓成實)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0년 송전소학교를 졸업했으나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이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한 끝에 1937년 9월에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을 시작했다. 제14대 대통령선거에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1998년 판문점을 통해 '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98년 남북 민간교류의 획기적 사건인 '금강산관광'을 성사시켰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러시아 방송 인터뷰
1990년 10월, 당시 에는 아직 정식 국교조차 맺지 않았던 소련을 방문하여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3시간 반 동안 환담했다. 그 자리에서 정주영은 소련의 시베리아 개발은 한국 기업이 주축이 되어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고, 어려운 형편의 북한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번영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해 달라는 부탁도 빼놓지 않았다. 시베리아 개발에 대한 그의 행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주영은 그 무렵 한국의 미래가 전적으로 시베리아 개발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극한의 동토를 개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혹독한 중동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못할 것도 없다는 자신감을 정주영은 갖고 있었다. 정주영은 모두 세 차례나 러시아를 방문했다. 그는 시베리아 스베틀라야 산림 공동개발과 함께 시베리아에서 남북한을 관통하여 부산까지 이어지는 가스파이프라인을 설치하자는 데 이어, 마침내 시베리아의 천연가스를 일본에까지 연결한다는 거대하고 원대한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다. 하지만 미온적인 시대적 상황에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01년에 타계하였다.
세종대왕의 한글, 해시계, 측우기, 혼천의( 천문 관측기)
세종대왕은 조선의 제4대 왕(1397~1450, 재위 1418~1450)이다.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이며,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1418년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8월에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왕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집현전(集賢殿)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다양하고 방대한 편찬 사업을 이루었다. 또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약 기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공법의 제정,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사업을 통하여 민족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반란군을 제압하는 관군
왜란의 대혼란 중에도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이몽학의 난이다. 왕족의 서얼 출신인 이몽학은 1596년(선조 29) 군량을 모으는 일을 하다가 대기근으로 굶주린 농민들을 선동해 임천(충남 부여)을 함락했다. “왜적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 잡겠다”고 주장해 삽시간에 수천의 무리를 이뤄 정산(청양), 대흥(예산) 등을 휩쓸고 서울로 향했다. 반란군이 홍주(홍성)에 이르렀을 때 홍주목사 홍가신(1541~1615)이 민병을 동원해 대파했다. 홍가신은 이몽학의 목에 현상금을 걸어 분열을 꾀했다. 이몽학의 부하들은 전세의 불리함을 느끼고 이몽학의 목을 베어 항복했다. 또한 홍가신은 반란군이 숨어있는 민가에 불을 질러 도망치는 반란군들을 모두 잡았다. 홍가신에게 1604년(선조47) 청난공신 1등이 내려졌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지만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난을 진압한 공로로 벼슬이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작품의 좌측에는 홍주성 밖의 반란군을 제압하기 위해 맨 앞에서 진두지휘하는 홍가신을 그렸다. 그 뒤를 따르는 관군은 “哨官(초관)”(조선시대 9품병사)과 “令(령)”의 붉은 깃발을 들고 커다란 함성과 함께 출전하는 모습이다. 우측에는 관군의 불화살로 불타는 민가에서 숨어있던 반란군이 탈출하여 저항할 힘을 잃고 산으로 도주하는 모습이다.
( 이 작품을 주문제작하면서 시대적 영웅에 대한 찬사 보다는 가난한 백성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아팠다. )
시대를 풍자하여 민중의 마음을 대변한 탈춤
양주별산대놀이는 경기도 양주를 중심으로 행해지던 탈놀이 국가무형문화재 제 2호이다. 유교사상이 뿌리 깊었던 조선시대의 엄격한 규율에 대한 저항을 탈춤을 통해 표현하였다.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하던 그 시절에 남성이 여자의 저고리를 입고 비구니가 남성의 손에 이끌려 따라가는 파격적인 모습이다. 탈춤은 민중의 마음을 대변하는 놀이로서 거침없는 행동과 걸죽한 입담으로 양반들의 허위와 가식을 거침없이 풍자하여 민중의 비판의식을 강하게 표출하였다. 일반 서민들은 이런 행위를 통해 억압받은 자신의 울분을 통쾌하게 풀었다. 사월 초파일 , 단오, 추석 등 크고 작은 명절에 공연자와 관객이 한 마당에 어울려 즐겼다.
조영식 박사(1921- 2012)의 오토피아 사상
이 작품은 경희대학교 설립자 조영식 이사장의 주문작품으로 현재 경희대학교 GCS 국제대학원에 소장되어 있다. 6.25전쟁을 상기 하면서 평소 핵전쟁의 위험을 염려하고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조용식 이사장의 오토피아 사상을 캔버스에 담았다. 조영식 박사는 1951년에 신흥초급대학을 인수해 종합대학 경희대학교로 성장시키고, 학교법인 경희학원을 창립하여 교육활동을 펼쳤으며, ‘잘살기운동’과 ‘밝은사회운동’, ‘인류평화운동’, ‘네오르네상스운동’을 제창하여 세계평화를 중심으로 한 사회활동으로도 유명하다. 세계대학총장회의의 창설을 주도하고, 1975년에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제4차 세계대학총장회의 총회에서 인류사회의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한 보스턴 선언문을 채택하고 ‘밝은사회운동’(GCS운동)을 제창하였다. 이와 함께 1979년에는 밝은사회국제클럽을 조직하였다. ‘지구가 하나인 것처럼 인류세계도 하나’라는 대전제에서 1980년대부터 세계평화운동을 시작했다. 1981년의 제6차 세계대학총장회의 총회에서 평화의 날 제정을 제창하고, 코스타리카 정부의 협력을 얻어 안건을 유엔에 제출해 11월 30일 제36차 유엔 총회에서 9월 셋째 주 화요일을 ‘국제 평화의 날’로 제정·공표하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제2의 르네상스’를 제창하고, ‘네오르네상스운동’을 전개하였다. 네오르네상스운동은 “정신적으로 아름답고, 물질적으로 풍요하며, 인간적으로 보람 있는 지구협력사회”를 이루자는 것으로, 이른바 ‘오토피아’(Oughtopia)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